동진 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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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 원제(東晉 元帝) 사마예(司馬睿)는 276년 낙양에서 태어나 서진 팔왕의 난을 겪으며 정치적 혼란을 피해 낭야(琅邪)로 피신했다. 307년 양주 지역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세력을 키웠고, 317년 서진이 멸망하자 강남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건강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동진을 건국했다. 즉위 후 왕씨 일족의 권세가 강해지자 이를 견제하려 했으나 왕돈의 난으로 실권을 잃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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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6년 출생 - 환이
환이는 서진과 동진 시대에 활약하며 관직을 역임하고 왕돈과 소준의 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소준의 난에서 항전하다 전사하여 사후 정위로 추증되고 간 시호를 받았다. - 322년 사망 - 양헌용
양헌용은 서진 혜제의 황후로, 팔왕의 난으로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다 전조의 유요에게 시집가 헌문황후가 되었다. - 322년 사망 - 장빈 (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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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명제는 사마예의 장남으로 왕돈의 난을 진압하고 강남 호족과의 융화 정책을 펼쳤으며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동진 원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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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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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사마 (司馬) |
휘 | 예 (睿) |
자 | 경문 (景文) |
시호 | 원황제 (元皇帝) |
묘호 | 중종 (中宗) |
출생 | 276년 |
사망 | 323년 1월 3일 |
매장지 | 건평릉 (建平陵), 난징, 장쑤 성 |
통치 | |
즉위일 | 318년 4월 26일 |
퇴위일 | 323년 1월 3일 |
연호 | 건무 (建武): 317년–318년 태흥 (太興): 318년–322년 영창 (永昌): 322년–323년 |
가계 | |
아버지 | 사마근 |
어머니 | 하후광기 |
배우자 | 원경황후 간문선황후 |
자녀 | 동진 명제 동진 간문제 |
기타 | |
왕조 | 동진 |
절후 | 유준 조유 변곤 왕돈 육엽 고영 주방 감탁 곽혁 |
2. 생애
사마예는 서진의 낭야공왕 사마근의 아들로 하내군(하남성) 온현 출신이며, 낙양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하후광희(하후위의 손녀)이다. 태희 원년(290년)에 부친이 35세로 급사하여 15세에 낭야왕에 봉해졌다. 이 해에 무제가 붕어하고 이듬해에는 팔왕의 난이 발발한다. 건무 원년(304년), 당시 권세를 떨치던 성도왕 사마영의 토벌에 참전했지만 실패하여 혜제와 함께 업에서 사마영의 감시 하에 놓였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업을 탈출하여 낙양에서 어머니와 만나 함께 봉국인 낭야로 돌아갔다.[21][22]
영가 원년(307년), 사마영이 동해왕 사마월에게 살해된 직후 사마월에 의해 안동장군·도독양주제군사에 임명되었다. 그 무렵 조정의 쇠퇴를 예측한 측근 왕도의 헌책에 따라 건업으로 향한다. 그 때 현인을 후하게 대접하여 강동을 잘 평정했다고 전해진다.
영가 4년(310년), 낙양의 위기 상황에서 수춘에 있던 정동장군 주복은 수춘으로의 천도를 계획했지만, 사마월은 배석 등에게 주복 토벌을 명했고, 회제의 강남 천도를 불가능하게 했다.
영가 5년(311년), 회제가 흉노계인 한(후의 전조)의 포로가 되어 평양으로 끌려가자, 사공 순번에 의해 추대되어 맹주가 되었다. 강주 자사 화일이 복종하지 않자 토벌하여 강주를 지배하에 두었다. 건흥 원년(313년)에 회제를 계승하여 민제가 즉위하자, 승상·대도독·중외제군사가 되어 강동의 정무·군사의 모든 것을 총괄하게 된다.
건흥 4년(316년), 한의 유총에 의한 침공을 받아 민제가 사로잡히고 서진이 완전히 멸망하자, 당시 승상·대도독·중외제군사로서 건업에 있던 사마예는 강남의 귀족과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진나라 마지막 생존자로서 황제에 즉위했다. 이것이 '''동진'''의 '''원제'''이다.
그러나 망명 정권인 동진의 황제 권력은 미약했고, 원제 밑에서 재상이 된 왕도, 그리고 그 종형 왕돈 등에게 군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당시의 평어 "왕과 말과 천하를 함께 한다"는 것은 동진에서의 낭야왕씨의 권세를 보여준다. 이 때문에 원제는 전한의 후예인 유괴와 조협을 요직에 앉혀, 낭야왕씨의 권력을 서서히 배제하려 했다. 하지만, 영창 원년(322년)에 도리어 왕돈에게 반란을 일으켜 조협과 그 외에도 중신이었던 대연·주의 등을 살해당했고, 유괴는 북방의 후조로 도망가 버렸다. 그러나 왕돈에게도 동진을 멸망시킬 만한 힘은 없었고, 같은 해 안에 왕돈의 군권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원제와 화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제는 48세로 붕어했다.
2. 1. 초기 생애와 서진 멸망
사마예는 276년 낙양[4]에서 낭야공(琅邪公) 사마근과 그의 부인 하후광희의 아들로 태어났다.[5] 사마주 낭야 공이자 진 무제의 삼촌이 283년에 사망하자, 아버지 사마근이 낭야공 작위를 계승하였고, 어머니 하후광희는 공주비(公主妃)가 되었다. 290년, 아버지 사마근이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7][8] 사마예는 15세의 나이로 낭야왕 작위를 계승했다.사마예가 낭야왕이 된 지 약 두 달 후, 무제가 사망하고 진 혜제가 즉위했다. 혜제는 발달 장애가 있었고,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섭정의 통제를 받으면서 팔왕의 난이 격렬해졌다. 사마예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304년,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사마예는 동해 공 사마월과 함께 성도 공 사마영에 맞서 소장군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사마영에게 패배한 후, 사마영은 사마예의 삼촌인 사마요를 처형했다. 사마예는 왕도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봉국(封國)인 낭야(琅邪, 대략 현대의 산둥성 유방시)로 도망가기로 결정했다.[12]
307년, 사마월은 사마예를 장강 이남의 양주(揚州, 현대의 저장성, 장쑤성 남부 및 안후이성) 일부 지역의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건업에 주둔시켰다. 사마예의 참모들 중, 왕도는 그의 수석 고문이었다. 사마예는 명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남부 호족 출신 인사들은 처음에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도의 조언에 따라 사마예는 하순(하제의 증손)과 고용(고옹의 손자[13])을 직접 방문하여 자신의 행정부에 봉사하도록 초청했다. 그 결과, 지역 주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고, 결국 사마예의 지도력을 신뢰하게 되었다. 당시 그 영지는 사마씨와 왕씨가 동등하게 다스렸다고 한다.[14][15]
311년,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한 군대에 함락되고, 회제가 포로로 잡혔다. 고위 관료인 순번은 낙양에서 탈출하여 옛 수도 근처에 임시 정부를 세웠고, 순번의 동의를 통해 사마예는 더 많은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많은 관료들이 양쯔강 남쪽으로 피신하면서 왕도는 사마예에게 북쪽 이민 가족의 유능한 인재를 찾아 그의 행정부에 봉사하도록 권유했다.
313년, 회제가 한나라에 의해 처형된 후, 회제의 조카인 사마업이 장안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사후에 민제로 알려짐). 민제의 이름 "업"(業)에 대한 휘 때문에 사마예의 본부인 건업(建業)은 건강(建康)으로 개명되었다. 사마예는 좌승상으로 임명되었으나, 황제를 돕기 위해 실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316년, 장안이 한 군대에 함락되고 민제가 포로로 잡혔다. 317년 봄, 사마예의 관료들은 그에게 왕위에 오르라고 요청했고, 317년 4월 6일에 사마 조와 무제가 조위의 섭정이었을 때 사용했던 "진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6]
2. 2. 동진 건국과 통치
311년 7월, 사마 월이 사망한 직후 낙양이 한 군대에 함락되고, 회제는 영가 사변 동안 포로로 잡혔다. 사마예는 수석 관리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특별 권한을 부여받으며 더 많은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많은 관료들이 양쯔강 남쪽으로 피신하면서 왕도는 사마예에게 북쪽 이민 가족의 유능한 인재를 찾아 그의 행정부에 봉사하도록 권유했고, 사마예는 100명 이상의 관리를 선발했다.[16]회하 남쪽에서, 사천성의 성한 왕조와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난하면서 난민 위기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형주(현대 후베이성)와 상주(현대 후난성) 두 주에서, 두도의 지도하에 311년에 반란이 일어났다. 사마예는 기회를 이용하여 영향력을 양쯔강 중부로 더 확장하여 자신의 상주 자사를 임명하고 왕승을 설득하여 관직을 포기하게 했다. 왕돈, 도간 등 다른 장군들의 지휘하에 형주와 상주에서 진나라 통치에 저항하는 농민 반군은 점차 복종하게 되었다.[16]
사마예는 처음에는 강남에서의 통치를 공고히하기 위해 남부 호족 가문에 의존했지만, 결국 북부 이민 가족에게 더 많이 의존하기 시작했다. 의흥의 주씨 가문의 주기와 같은 강경파들은 북부 이민자들을 몰아내고 사마예에게 남부 호족들의 권력을 회복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313년과 315년에 그들의 음모는 모두 발각되었고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하여 사마예의 입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16]
313년, 회제가 한나라에 의해 처형된 후, 회제의 조카인 사마 업은 장안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사후에 민제로 알려짐). 민제의 이름 "업"(業)에 대한 휘 때문에 사마예의 본부인 건강(建業)은 건강(建康)으로 개명되었다. 사마예는 좌승상으로 임명되었고, 그 직함을 수락했다. 그의 장군이자 난민 지도자인 조적이 북쪽으로 군대를 이끌 것을 요청했을 때, 그는 조적에게 실제 군대는 없이 1천 명의 병력에 대한 물자만 제공했다. 조적은 스스로 병사를 찾아야 했지만 결국 황하 남쪽의 여러 도시를 회복할 수 있었다.[16]
316년, 장안이 한 군대에 함락되고 민제가 포로로 잡혔다. 317년 봄, 그의 관료들은 그에게 왕위에 오르라고 요청했다. 그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317년 4월 6일에 사마 조와 무제가 조위의 섭정이었을 때 사용했던 "진왕"이라는 칭호를 황제 대신 사용했다.[16] 그는 같은 해 5월 1일에 아들 사마 소를 태자로 책봉했다.[17]
318년 4월 23일, 민제의 처형 소식이 건강에 전해졌다. 사마예는 사흘 뒤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19] 당시 그의 직할 통치 지역은 대략 황하 이남과 삼협 이동이었지만, 북쪽에는 진 영토의 일부, 그중에서도 특히 유주 (현대 베이징, 톈진, 그리고 북부 허베이)가 선비족 지사 단비제의 통치를 받으며 그를 황제로 인정했다. 그러나 량주 (현대 중부 및 서부 간쑤)의 지사 장시는 그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민제의 건흥 연호를 계속 사용했으므로 인정하지 않음을 암시했다. [19]
319년에 단비제의 군대는 후조를 건국한 석륵에게 패배했다. 단은 진에게 여전히 충성을 다하는 다른 지사인 소허에게 도망쳤다. 이듬해 석륵은 장군 석호와 공창을 보내 소허를 포획했다. 그들은 성공했지만 단비제는 소허의 군대를 장악하여 다시 북쪽에서 저항을 이끌었다. 한편, 사마보는 기근에 시달리고 전조의 침략에 직면하여 장시의 영토로 도망치려 했으나 거부당했고, 곧 장군 장춘()과 양차()에게 살해되어 사마보의 친척 사마찬으로 교체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안이 이끄는 전조군은 복수를 위해 사마찬의 영토를 공격하여 그를 죽이고, 차례로 장춘을 죽이고 양차를 사로잡아 진의 진군을 진군에서 끝냈다.[20]
320년, 장시는 그의 경비병 염섭(閻涉중국어)과 조앙()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이는 마법사 유홍()이 퍼뜨린 소문으로 인한 것이었다. 장준의 아들이 당시 어렸기 때문에 그의 형이자 후임자 장무는 유홍을 처형하고 일반 사면을 선포하여 자신의 영토가 진나라로부터 독립했음을 효과적으로 선언했다. 또한 장무는 대내적으로 연호 "영광"(永光중국어)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다른 국가와의 소통에서는 "건흥"을 사용하여 장무의 영토가 사실상 진나라로부터 독립했음을 증명했다.[20]
320년 무렵, 원제의 왕돈과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렀다. 원제는 그를 두려워하여 왕돈을 반대하는 유회(劉隗)와 조협(刁協)과 같은 사람들을 주변에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은 명성이 엇갈리는 인물들이었는데, 왕씨 일가의 권력을 억누르려다 많은 다른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20]
321년, 원제는 대원(戴淵)과 유회에게 상당한 병력을 맡겨 후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왕돈의 잠재적인 공격에 대비하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후조의 공격을 막는 임무를 맡은 장군은 조적이었다. 당시 그는 진나라의 예주 자사였다. 조적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후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듬해 진천(陳川)이 배반하고 조적이 패배했지만, 석륵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결국 이는 교착 상태로 이어졌고, 이후 황하를 경계로 평화와 무역 관계가 수립되는 비공식적인 데탕트가 이루어졌다. 조적이 죽자, 진나라 측에는 후조의 진나라 확장을 견제할 사람이 없었다. 조적이 죽은 후, 이 지역의 세력 균형은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자주 오갔다.[20]
322년 봄, 왕돈은 원제가 유회와 조협에게 속고 있으며, 그의 유일한 의도는 정부를 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원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왕돈은 곧 건강에 도착하여 원제의 군대를 격파하고, 쉽게 건강에 입성하여 약탈했다. 유회는 후조로 도망갔고, 조협, 대원, 주의(周顗)는 살해당했다. 원제는 굴복하여 왕돈에게 서부 지역의 추가적인 권한을 부여해야 했다. 만족한 왕돈은 원제가 왕위에 머물도록 허락하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근거지인 무창으로 물러났다. [20]
패배 이후 원제는 낙담하고 병들어 323년 1월에 사망했다. 태자 사마 소가 황위에 올라 진 명제가 되었다.[20]
하내군(하남성) 온현 출신으로 서진의 낭야공왕 사마근의 아들 사마예로서 낙양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하후광희(하후위의 손녀)이다. 동생으로 동안왕 사마혼이 있다. 태희 원년(290년)에 부친이 35세로 급사하여 15세에 낭야왕에 봉해졌다. 이 해에 무제가 붕어하고 이듬해에는 팔왕의 난이 발발한다. 건무 원년(304년), 당시 권세를 떨치던 성도왕 사마영의 토벌에 참전했지만 실패하여 혜제와 함께 업에서 사마영의 감시 하에 놓였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업을 탈출하여 낙양에서 어머니와 만나 함께 봉국인 낭야로 돌아갔다. 도중에 황하의 나루터를 건널 때 미행당해 유치될 뻔했다. 사마영이 일족을 곁에 두고 감시하며 지방으로 자유롭게 떠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늦게 온 종자가 따라와 사마예의 말을 채찍으로 치면서 "사령이여, 정부는 귀인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는데, 너도 붙잡혔는가"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관리인은 통행을 허락했다[21][22]。
사마영이 동해왕 사마월에게 살해된 직후 사마월에 의해 영가 원년에 안동장군·도독양주제군사에 임명되었다. 그 무렵 조정의 쇠퇴를 예측한 측근 왕도의 헌책에 따라 건업으로 향한다. 그 때 현인을 후하게 대접하여 강동을 잘 평정했다고 전해진다.
영가 4년(310년), 낙양의 위기 상황에서 수춘에 있던 정동장군 주복은 수춘으로의 천도를 계획했지만, 사마월은 배석 등에게 주복 토벌을 명했고, 회제의 강남 천도를 불가능하게 했다.
영가 5년(311년), 회제가 흉노계인 한(후의 전조)의 포로가 되어 평양으로 끌려가자, 사공 순번에 의해 추대되어 맹주가 되었다. 강주 자사 화일이 복종하지 않자 토벌하여 강주를 지배하에 두었다. 건흥 원년에 회제를 계승하여 민제가 즉위하자, 승상·대도독·중외제군사가 되어 강동의 정무·군사의 모든 것을 총괄하게 된다.
건흥 4년(316년), 한의 유총에 의한 침공을 받아 민제가 사로잡히고 서진이 완전히 멸망하자, 당시 승상·대도독·중외제군사로서 건업에 있던 사마예는 강남의 귀족과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진나라 마지막 생존자로서 황제에 즉위했다. 이것이, '''동진'''의 '''원제'''이다.
그러나 망명 정권인 동진의 황제 권력은 미약했고, 사마예와 같은 서진의 황족인 남양왕 사마보는 사마예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진왕을 참칭했다. 또한, 원제 밑에서 재상이 된 왕도, 그리고 그 종형 왕돈 등에게 군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당시의 평어 "왕과 말과 천하를 함께 한다"는 것은 동진에서의 낭야왕씨의 권세를 이야기한다. 이 때문에 원제는, 복심인 전한의 후예인 유괴와 조협을 요직에 앉혀, 낭야왕씨의 권력을 서서히 배제하려 했다. 하지만, 영창 원년(322년)에 도리어 왕돈에게 반란을 일으켜 조협과 그 외에도 중신이었던 대연·주의 등을 살해당했고, 유괴는 북방의 후조로 도망가 버렸다. 그러나 왕돈에게도 동진을 멸망시킬 만한 힘은 없었고, 같은 해 안에 왕돈의 군권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원제와 화해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48세로 붕어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사마의 | |
증조모 | 복부인(伏夫人) | |
조부 | 낭야무왕(瑯邪武王) 사마주 | |
조모 | 낭야왕비 제갈씨(諸葛氏) | |
부친 | 낭야공왕(瑯邪恭王) 사마근(司馬覲) | |
모친 | 낭야왕비 하후광희(하후위의 손녀) | |
동생 | 동안왕 사마혼 | |
황후 | 원경황후 유씨(元敬皇后 虞氏) | |
후궁 | 간문선황태후 형양 정씨(簡文宣皇太后 滎陽鄭氏) | |
후궁 | 첩여 석씨(婕妤 石氏) | |
후궁 | 재인 왕씨(才人 王氏) | |
후궁 | 순부인 순씨(豫章君 荀氏) | |
자녀 | 생모 | 비고 |
사마소 | 순씨 | 동진 제2대 황제 |
사마포 | 순씨 | 랑야효왕 |
동해애왕 | 석첩여 | 동해애왕 |
사마희 | 왕재인 | 무릉위왕 |
사마환 | 정아춘 | 랑야도왕 |
사마욱 | 정아춘 | 동진 제8대 황제 |
순양공주 | 불명 | 순선에게 시집감 |
3. 1. 조상
3. 2. 처첩
- 원경황후(元敬皇后) 우맹모(虞孟母, ? ~ 312년)
- 간문선황태후(簡文宣皇太后) 정아춘(鄭阿春, ? ~ 326년)
- 예장군군(豫章郡君) 순씨(荀氏, ? ~ 335년)
- 첩여(婕妤) 석씨(石氏)
- 재인(才人) 왕씨(王氏)
3. 3. 자녀
이름 | 출생-사망 | 생모 | 비고 |
---|---|---|---|
사마소 | 299년-325년 | 순씨 | 동진 제2대 황제 |
사마부 | 300년-317년 | 순씨 | 낭야효왕 |
사마충 | 311년-341년 | 석첩여 | 동해애왕 |
사마희 | 316년-381년 | 왕재인 | 무릉위왕 |
사마환 | 317년-318년 | 정아춘 | 낭야도왕 |
사마욱 | 320년-372년 | 정아춘 | 동진 제8대 황제 |
심양공주 | 323년 출생 | 불명 | 순선에게 시집감 |
4. 출생에 대한 이설
북제에서 편찬된 《위서》에는 사마예가 서진 장수 우금의 사생아라는 주장이 실려 있다.[16] 이는 북방 왕조에서 동진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위서》는 북제가 북방의 왕조였기 때문에 강남의 동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마예를 휘로 불렀다. 또한, 우금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어머니 하후광희가 하급 관리와 밀통하여 사마예를 낳았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료 간의 시대 불일치, 우금이 사마의에게 독살당했다는 확증 부족 등으로 인해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16]
5. 평가 및 영향
사마예는 서진 멸망 이후 혼란 속에서 동진을 건국하여 중원 왕조의 명맥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강남 지역을 안정시키고 경제 발전을 촉진하여, 이후 남북조시대 남조 왕조들의 기반을 마련했다.[16][17][18][19][20] 그러나 왕씨 세력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동진 초기 정치 불안을 야기하고 황권 약화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한국사의 관점에서, 동진은 고구려, 백제와 외교 관계를 맺으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동진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진영에서는 사마예가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점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에서는 왕씨 세력에 휘둘려 황권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Book of Jin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Jin Shu
[5]
서적
Jin Shu
[6]
서적
Jin Shu
[7]
서적
Book of Jin
[8]
서적
Jin Shu
[9]
서적
Jin Shu
[10]
서적
Jin Shu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Jin Shu
[14]
서적
Book of Jin
[15]
서적
《東晉門閥政治》
Peking University Press
1996
[16]
서적
Zizhi Tongjian
[17]
서적
Zizhi Tongjian
[18]
서적
Zizhi Tongjian
[19]
서적
Zizhi Tongjian
[20]
서적
Zizhi Tongjian
[21]
서적
晋書
[22]
서적
大唐帝国 中国の中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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